부흥이 오는 방식
사도행전 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부흥, 우리가 간구했던 그러나 잊힌 기도
제가 사역을 막 시작했던 90년대 초, 한국 교회는 뭔지 모를 성장통을 맞이한 듯 보였습니다. 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성장세가 주춤거리더니,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공연히 ‘한국 교회의 쇠퇴기’란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답답함과 함께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이 더욱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마틴 로이드 존스의 책, ‘부흥’이 한국 교회에 던져지며 사역적 한계에 부딪히며 갑갑했던 마음과 새로운 차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길 원했던 갈증이 부흥이란 해답으로 이어졌습니다. 부흥을 구하는 찬양과 기도가 젊은이들 가운데 퍼졌고, 부흥이란 이름으로 콘서트와 집회들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태우던 에너지가 모두 소진이라도 된 듯이, 한 순간 부흥에 대한 외침과 노래가 잠잠해졌습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했던 2007년 이후입니다. 30~40개의 크고 작은 집회들이 곳곳에서 열렸고, 많은 성도들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을 위해 모여 기도했던 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했던 부흥의 불, 도시와 나라를 바꾸는 부흥의 불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 신기할 만큼 부흥이란 단어가 우리에게서 멀어져 간 듯 합니다. 마치 지나간 유행처럼, 부흥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부흥에 대한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2007년이 지났다고, 부흥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아니라 120주년이든 150주년이든, 부흥을 볼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부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역사가 마침내 일어날때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부흥과 오순절
본문의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을 제외한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의 날일 것입니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할 것이다.”라는 에스겔의 예언과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과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라 말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역사적 부흥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오순절은 보리의 첫 단을 드리는 초실절을 맞으며 일곱 번의 안식일을 지낸 후, 50일째 되는 날을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7번의 안식년 후 50년째 되는 해에 주빌리, 즉 희년을 선포하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이 전해진 날. 그리고 그 말씀이 영이 되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임한 날. 구약의 선지서들이 예언한 새 영으로 새 법안에서 사는 날이,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부흥의 방식 –첫째, 부흥의 영으로
우리는 부흥의 두 가지 방식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부흥의 영’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람과 불과 물로 성령의 임하심을 표현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들리는 급하고 강한 바람의 성령님, 각 사람 머리 위에 불의 혀로 임한 성령님, 새 술에 취해 방언으로 말하게 하시는 성령님. 이 모든 표현들은 보이지 않는 성령, 부흥의 영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존재하며 구체적으로 역사하는지를 말합니다. 부흥은 분명한 영적 세계가 표출되어 나타나는 일입니다. 실존하는 영적 세계가 물리적 세계인 이 땅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이 임할 때 실제적인 영적 돌파가 일어납니다. 설명할 수 없이 몸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내 안에 숨어있던 어둠이 비명을 지르며 떠나가기도 합니다. 오랜 병이 치유되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믿음과 지혜가 부어지기도 합니다. 도무지 앞에 나서지 못했던 사람이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가에서 복음을 외치기도 하고, 내 삶을 꾸리기에 급급했던 사람이 타인을 섬기는 일에 앞장 서기도 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던 자를 사랑하게 되고 용서되지 않던 자를 용서하게 되고,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부흥을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본문의 10일간의 기도나 다니엘이 기도한 21일이나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40일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실재가 되어 우리에게 임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방문하기 위해서, 내가 뜻하고 계획했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스스로를 정결케 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불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내 감정과 의지로 자아내지 않은 하나님의 부흥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부흥을 맞이하고 담아낼 사람으로 단장됩니다.
부흥의 방식 –둘째, 여호와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두 번째, 부흥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할 때 일어납니다. 역사속에 기록된 부흥은 영적 현상으로만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부흥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사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하나님의 소리가 선포되는 말씀의 역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 본문을 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에게 성령으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자 그의 선포를 들은 삼천명이 회개하여 돌아옵니다. 뿐만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벌하기 위해 잡아들인 서기관과 장로들은 그들의 말이 이전과 전혀 달라짐을 보고 의아해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성령의 권능이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환상에 의지하여 이방인인 고넬료에 집을 마지못해 방문한 베드로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높은 뜻을 깨닫고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 어떻게 그 온 집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나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분명한 복음, 진리의 선포를 통해서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때로 야단스러운 현상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말씀을 통해 부흥이 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대언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을 진동시키며 임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에서 주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를 보이며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도저히 소망 없어 보이던 뼈들을 보던 에스겔에게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에스겔이 주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가망없던 마른 뼈들이 군대로 일어났습니다. 저를 포함한 이 몸의 메신저들을 통해 하나님의 소리가 대언되길 소원합니다. 낙망된 마음을 회복시키고 거룩한 열정을 일으키며 위대한 소원을 품게하는 하나님의 부흥이 우리의 간구를 통해 이 몸과 이 나라와 이 세대에 부어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