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을 살아내는 방식
에베소서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부르심을 받은 자 답게 살라
에베소서 4장에 이르러 바울은 신앙, 즉 신학을 살아내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며 ‘부르심’이란 주제를 한번 더 꺼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이 참으로 놀랍고 위대하며 존귀하기에, 앞서 1~3장을 통해 나누었던 이 모든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고 우리의 정체성을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시작하신 창조주의 섭리와 그 신비에 안에 은혜의 경륜, 비밀한 경륜, 때가 찬 경륜이 있습니다. 이는 구원의 경영 즉 개인의 구원의 부르심과, 교회의 경영 즉 교회로의 부르심과, 하나님 나라의 경영 즉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로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택함 받았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이 땅에 풀어내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무너지고 훼파된 이 세상을 정복하고 회복하는 자로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정체성으로 부름받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섬겨야 할까요? 부르심을 이루어 내는 우리의 태도와 삶의 방식은 과연 어떠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어지는 2~3절로 세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겸손과 온유, 두 번째로 오래참음과 용납함, 세 번째는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첫째, 겸손과 온유로 행하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이웃과 세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선한 일을 행하는 듯 하면서, 그 종국에 주님이 아닌 나의 의를 드러내는 분들을 보기도 합니다. 주님은 부르심을 감당하며 세상 앞에 설 때에 겸손과 온유로 행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원의 신비를 맛본 자답게 행하라’라는 의미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팔복의 1~3복에 속해 있습니다.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의 복을 받은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심겨지는 신의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사 행하신 일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한 내가 너희와 같이 하등한 육체를 입고 친히 이 땅까지 와주었다!” 하시며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오직 겸손과 온유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진정한 겸손과 온유는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성품입니다. 내 안에 가득한 죄성들을 뼈저리게 느끼고 내 힘으로는 결단코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고백한 자들. 이런 자들이 겸손과 온유로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세상과 사람들 앞에 서는 자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맺어질 수 없습니다.
둘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용납하라
두 번째는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함입니다. 이는 ‘제자도를 가진 자답게 행하라’라는 의미입니다. 팔복의 4~6복을 받은 자들처럼, 의에 주리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청결한 마음으로 세상 앞에 서라는 도전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내 안의 죄성을 처절하게 발견한 자들은, 이제 다른 이들을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품어 주셨듯이, 그들이 자라나도록 끌어안고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 이후 세상과는 구별된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이전과 달라진 내 모습에 ‘나의 의’가 생길 때,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나를 발견하길 축원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나 자신에 대한 오래 참음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성장할 것입니다. 점점 더 주님을 알아가며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지금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을 인내하며 용납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일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의 의가 깨지고, 주님을 다시 바라보는 용기를 내야 하는 과정들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성장합니다. 나 자신을 오래 참고 용납하면서, 연약한 자들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젊은 사역자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기다림과 용납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집니다. 이 씨름이 주님 나라에 갈 때 까지 있음을 기억합시다. 끊임없이 씨름하고 포기 않고 기다리는 이 여정을 지루해 하거나 지쳐하지 않길 축원합니다.
셋째,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
세 번째는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됨을 지키라 말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마음을 평안히 유지하여 서로 다투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평안이라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의 번역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는 창세기 14장과 히브리서 7장의 ‘살렘’과 같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브라함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드리며 그의 주권을 고백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살렘이 예루살렘의 근원적 이름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왕국의 이름이 살렘, 샬롬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평강임을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됨을 지키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으로 하나됨을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된 자들입니다. 주님은 서로 상관없는 자들을 억지로 모아 하나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으십니다. 주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으니, 그를 힘써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평안의 매는 줄’은 골로새서 2:19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를 연합하게 하는 ‘힘 줄’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샬롬. 평강의 왕으로 인해 하나됨을 유지합시다. 샬롬이 흔들리고 깨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에서 내 심령이 보호받길 기도합시다.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에 거하며, 하나됨의 능력을 경험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