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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승리의 비밀 2


역대상 13:1~14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전환기의 때, 회복할 세가지-첫째,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는 삶

우리는 영적 전환기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보이는 세계가 창조되었듯, 우리가 살아낼 이 시대의 상황이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넘어 새로운 영적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역대상 본문의 웃사의 사건은 이러한 전환기의 날, 우리가 무엇을 회복하고 사수해야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3절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지난주일 우리는 전환기의 때 승리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날마다 고백하는 신본주의적 삶을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막연한 초월적 존재를 의지하는 샤머니즘이나 타성에 젖은 종교 활동이 되질 않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시작하시되 그 뜻대로 열방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한 우리와 오늘도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삶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이 그와 더 깊이 동행되어지기 위해, 그의 뜻을 우리로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위험하게 생각합니다. 일명 ‘직통계시파’라 하는 자들이 성경에서 벗어난 그들의 말들을 진리로 왜곡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주님은 설교 말씀을 통해, 성도와의 교제 안에서, 찬송 중에, 때로는 꿈으로도 그의 마음과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이 모든 소리의 최종 권위는 성경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들은 주님의 음성은 반드시 성경 안에서, 성경으로 검증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기준이 분명하다면, 이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길 갈망하며 날마다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이었습니다. 사울은 평생, 그의 문제들을 ‘나의 하나님’앞에 가져가지 않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사무엘을 의지하여, ‘그의 하나님’을 통해 문제를 해결 받으려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샤머니즘 같이 변질되지 않길 축원합니다. 목사는 당신 대신 신의 뜻을 점쳐 주거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의 자녀임을 기억합시다. 전환기의 날,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리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의 삶에 하나님의 승리가 임할 수 있습니다.

전환기의 때, 회복할 세가지-둘째, 시대를 분별하는 영성 전환기의 때, 우리가 반드시 회복하고 사수할 두 번째는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성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눈이기도 합니다. 보이는 상황과 환경을 넘어, 하늘을 움직이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가던 소가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뛰기 시작했다 합니다. 이 동일한 장면이 사무엘하 6:6에서는 나곤의 타작마당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이 기돈의 타작마당이라고도 표현되는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곤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가던 소는 ‘기준’, ‘바로잡는 줄’이란 뜻을 가진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바로서는 때가 이른 것입니다. 웃사는 이를 몰라, 법궤를 덥썩 잡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였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깨어나는 때를 분별할 수 없던 것입니다. 이 땅에 변화를 작동시키는 하늘의 새로운 움직임을 볼 수 있길 축원합니다. 사람의 경험과 통계와 전략에서 눈을 들어, 하늘의 주관자를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 역대상 12:32은 다윗의 왕조가 서는 이스라엘의 대전환기에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연출하고 조성하는 상황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굴리고 눈치를 보며 사람에게 줄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보며 그를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보이는 것들을 따라 기도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그의 소리를 듣고 그의 마음을 기도합시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소가 뛰는 영적 전환의 때가 올 때, 웃사와 같이 하나님의 움직임을 볼 수 없는 자는 땅에 엎드려질 것입니다. 영적 진동이 우리를 흔들 때, 하늘을 보며 멈추어야 할 때와 전진해야 할 때를 분별하는 자로 서길 축원합니다.

전환기의 때, 회복할 세가지 -셋째, 하나님의 방식을 사수하는 삶 전환기의 때, 또한 우리는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 되는 하나님의 방식들을 사수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에 따라 기민하게 대처해야 하는 사회적 요구들과 생활 방식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세상 모두와 다른 선택일지언정 성도가 사수해야 하는 삶의 모습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가 잊어서는 안 되는, 거룩한 나라의 방법들이 있는 것입니다. 법궤를 만진 웃사가 찢겨 죽은 본문의 사건은 다윗에게 큰 두려움과 실패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다윗이 잊었던 하나님의 방식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세운 왕이 아닌, 하늘의 주가 선민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 따라야 하는 방식들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그 첫째가 모세의 계명의 회복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20년 동안 예배가 멈추어진 나라에서, 하나님의 방식도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나 웃사의 죽음 이후, 다윗은 법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식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의 방법대로 하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일을 이룰 분명한 식양을 갖고 계시며, 또한 우리로 그것들을 알게 하십니다. 노아의 방주도, 모세의 성막도, 솔로몬의 성전도 모두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우리 삶의 전반에, 이러한 하나님의 식양이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대충 감을 따라 지속하는 신앙생활은, 결국 세상과의 타협안에서 빛을 잃고 사지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방법이 내 안에 심겨져야, 어두운 날에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두 번째로 레위인을 회복합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이스라엘을 살펴보니, 어느 한 지파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11지파가 삶의 터전과 기업을 나누어 주어야 할 레위지파입니다. 법궤와 예배가 사라진 땅에서 레위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각자의 길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다시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외칠 찬송과 기도와 말씀의 선포를 회복시킵니다. 이 시대, 우리를 살리는 방법도 오직 예배와 기도, 말씀입니다. 더 은밀하고 교묘하고 깊은 죄의 방법들로 세상의 영향력이 확장되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예배와 기도, 말씀으로 여전히 승리할 것입니다. 이제, 레위인을 회복한 다윗은 마침내 천상의 예배를 회복합니다. 하늘이 열려 이 땅과 연결되는, 다윗의 장막이 세워진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이 위대한 비밀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다윗에게 임한 영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땅에서 본 적 없는, 멈추지 않는 하늘의 예배를 이스라엘이 행하게 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꾸며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윗 스스로가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듯, 그는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예배를 영으로 경험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지혜와 계시의 영이 부어지길 축원합니다. 이 땅이 어둠에 잠식당해 갈 때,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합시다.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그의 생기를 대언합시다. 주님의 방법으로 전진할 때,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옮기는 다윗들이 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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