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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명과 부르심


사도행전 1:1-5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우리의 사명과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의 “다시”에 응답합시다.>

2017년의 첫 날이자, 첫 주일이었던 1월 1일,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전의 상황들이 종료되며, 재조정과 재배치가 일어나고, 새로운 기회와 시작이 열림을 말할 것입니다. 열방을 그 뜻대로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이 나라와, 또한 우리를 새로운 시작과 기회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를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붙들고, 우리의 사명과 부르심을 향해 분명히 걸어가야 합니다. 그의 섭리 안에서 그의 뜻을 위해 우리를 불러내신 주님은, 오늘 우리의 사명과 부르심을 따라 “다시”를 회복하길 말씀하십니다.

<부흥을 지나 변화로 (행1:1~2,8)>

“우리는 이 땅의 주님의 제자들을 복음서의 주님곁에서 머무르던 제자에서 사도행전 이후 성령으로 보내심을 받는 사도적 제자로 일으키어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가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 TCC가 오늘 이 곳에 있는 것은 바로 이 사명과 부르심을 위함이라 믿습니다. 주님은 생각지 못한 때, 생각지 못한 길로 우리를 이끄셨고,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기름부음으로 새로운 땅에 서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이어서 쓴 성경입니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이란 문구로 시작되는 사도행전은 이전의 복음서와 그 중심이 판이하게 달라질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은 참으로 어리바리한 자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을 까먹어서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었고, 아이에게 들린 귀신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누가 더 높은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의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사건을 봅시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어머니를 대동하여 주님의 나라에서 우편과 좌편에 각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되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복음서의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머무르던 제자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 제자도의 시간을 40년에서, 길게는 50년 가까이 지나가고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전과 다른 부흥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부흥을 지나,변화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자 부르심입니다. 예수님 곁에 머무르던 제자에서 보내심 받은 제자, 곧 사도적 제자로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며, 그 이름으로 온 이스라엘이 들썩이게 하는 새로운 부흥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육체로 마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합시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매여, 하늘의 소망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전의 부흥을 넘어 변화를 가져오는 종국적 부흥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심 받은 이유이며,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도적 제자는 제자도를 통과하여, 십자가 위로 올라가는 자입니다.>

부흥을 지나, 변화를 일으키는 자들! 우리의 사명이자 부르심인 사도적 제자는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먼저는 제자도를 통과한 자란 것입니다. 제자도를 통과하지 않은 사도적 제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1995년 ‘사도행전적 교회’라는 주님의 감동을 따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을 지나 왔습니다. 이제, ‘다시 십자가’를 외치며 산상수훈의 삶으로 돌이키자는 저의 메시지는 복음주의의 한계와, 그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적을 두고 리더로 섬겨왔던 은사주의의 또 다른 한계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선포케 하신 소리이자 새롭게 이끄신 방향입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은 비록 연약했을지언정, 분명한 회개와 자기부인과 권리포기와 나의 종됨을 철저하게 경험하고 통과한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도 없이 은사나 성령의 임재의 현상을 드러내는 무리는 사도적 제자가 아닙니다. 사도적 제자는 제자도의 여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도 안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내가 뼛속까지 죄인임을 직면하고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주님께 돌이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부인과 권리포기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고백하며, 나의 나됨을 기꺼이 죽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재산이든 명예이든, 나의 노력과 헌신에 따라 주어진 것일지언정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자인 것입니다. 또한 제자도는 철저한 종 됨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온전히 드릴 단 한 분, 곧 진정한 왕이시며 우리의 소유자 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며, 섬김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도를 통과한 사도적 제자는 이제 십자가 위로 올라갑니다. 이것이 사도적 제자의 두번째 특징입니다. 아무나 십자가 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제자도의 끝에서 사도적 제자로 변화된 자들이 순교적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사도적 제자는 주님의 자취를 따르는 자로 서게 됩니다. 하늘에 영원한 소망은 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당함을 이상히 여기지 맙시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따라, 당신의 삶을 답습하는 그리스도인, 사도적 제자들을 열방에서 일으키십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도적 제자의 표현, “성령받은 제자”로 섭시다.>

결론적으로 사도적 제자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제자란 것입니다. 회개를 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다가 또한 십자가 뒤에서 처절하게 패배도 했던 제자들이, 십자가 위로 올라가는 사도적 제자가 된 것은 성령의 충만함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한 번의 설교로 오천명의 사람들을 돌이키며, 사람들의 칭송을 들을 때, 이제는 내가 아닌 주님을 드러내고 높여 드립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은 머리 좋은 자들도 할 수 있으나, 자기부인과 권리포기와 철저한 종 됨의 고백은 공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이를 가능케 하십니다. 성령께서 사도행전의 제자들을 복음서의 제자들과 구분짓는 경계선 되시는 것입니다. 숨어있던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아와, 예수님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저주를 풀어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합니다. 사도적 제자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제자들이 누가 높은 자인가 다투었듯이, 교회 안에서 자리 싸움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지파와 같이 성전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자들 외에는, 각 사람이 부르심 받은 일터와 가정이 신앙생활의 장소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병을 치유하며, 또 다른 제자들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몸을 이루어, 함께 그 사랑을 나누고, 격려 받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뿐 아니라, 이제 우리는 부르신 곳에서 사도적 제자로 서야 합니다. 2017년, 이 교회 안에 보내심을 받는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계속해서 서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능력있는 교회로 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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